1억 에이커의 농지가 황무지로 변하고, 3km 높이의 거대한 흙먼지 벽이 뉴욕의 하늘을 삼키던 1930년대.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이 흙먼지에 가려지고,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 네 명 중 한 명이 길거리로 나앉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920년대의 찬란했던 번영은 단 3년 만에 시가총액 90% 증발이라는 참혹한 영수증으로 돌아왔습니다.
주식 시장의 파멸은 국경을 넘어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고, 자본주의는 창단 이래 가장 어두운 '심판의 날'을 맞이했습니다.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이 나오게 된 배경이 된 1929년 검은 목요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화려함, 그 뒤에 쌓여가던 균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은 말 그대로 '세계의 공장'이었습니다. 전 세계 제조업의 42%, 자동차 생산량의 80%를 혼자 장악했고, 헨리 포드의 어셈블리 라인(Assembly Line), 즉 컨베이어 벨트 방식의 대량 생산 시스템 덕분에 자동차가 중산층의 일상품이 되었습니다. 소비는 할부 제도가 불을 질렀습니다. '오늘 사고 나중에 지불하라'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냉장고, 라디오, 세탁기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그 화려함의 꼭대기에 주식 시장이 있었습니다. 다우존스 지수(Dow Jones Industrial Average)는 1920년부터 1929년까지 245% 상승했습니다. 여기서 다우존스 지수란 미국의 대표 기업 30개 종목의 주가를 평균 낸 지표로, 미국 경기의 체온계 역할을 합니다. 당시 은행들은 주식 매수를 위해 최대 10배까지 대출해주는 마진 거래(Margin Trading)를 허용했습니다. 마진 거래란 자기 돈의 일부만 내고 나머지는 빌려서 훨씬 큰 금액의 주식을 사는 방식입니다. 10%의 현금으로 90%를 빌려 투자하는 구조이니, 주가가 10%만 떨어져도 전 재산이 사라집니다.
소득 불평등도 심각했습니다. 당시 상위 0.5%가 미국 전체 부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었고, 전체 가정의 80%는 은행에 예금 한 푼 없었습니다. 다우존스 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동안, 창고에는 팔리지 않는 재고가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붕괴의 씨앗은 세 가지 구조에서 이미 자라고 있었습니다.
- 과잉 생산: 공장은 수요를 무시하고 제품을 쏟아냈고, 창고에 재고가 쌓이는데도 생산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 극심한 소득 불평등: 상위 0.5%가 미국 전체 부의 3분의 1을 쥐고 있었고, 가정의 80%는 은행 예금이 전혀 없었습니다.
- 주식 거품: 실적 데이터조차 없는 기업의 주가가 소문만으로 두세 배씩 뛰었습니다.
경제학자 어빙 피셔는 1929년 9월, "주가는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고원에 도달했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검은 목요일이 찾아왔습니다.
대공황 그리고 잘못된 대처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아침, 뉴욕 증권 거래소가 문을 열자마자 매도 주문이 폭주했습니다. 이날 하루에만 1,290만 주가 손바뀜 됐고, 시스템이 마비될 지경이었습니다. 월스트리트의 거물들이 긴급 회동을 열고 JP모건 은행을 중심으로 주식을 사들이며 1907년처럼 위기를 수습하려 했지만, 이번엔 달랐습니다. 경제 규모 자체가 1907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진 데다, 실물 경제 전체가 주식 시장과 맞물려 있어서 몇몇 큰손의 자금으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 뒤 3년 만에 미국 주식 시가총액의 90%가 증발했습니다. 9,000개 이상의 은행이 줄도산하면서 평생 모은 예금이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1933년에는 실업률이 25%까지 치솟았습니다. 일할 수 있는 사람 네 명 중 한 명이 일자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IMF 외환위기 당시 한국의 최고 실업률이 8%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참혹함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됩니다(출처: 미국 노동통계국).
농촌은 더 참혹했습니다. 1930년대 초 더스트볼(Dust Bowl)이 미국 대평원을 덮쳤습니다. 더스트볼이란 과잉 경작으로 표토가 극도로 약해진 상황에서 극심한 가뭄이 겹쳐 발생한 거대한 먼지 폭풍 현상입니다. 높이 3km에 달하는 흙먼지 벽이 동부 해안까지 날아가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이 뿌옇게 보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1억 에이커의 농지가 황폐해지자 250만 명이 짐을 싸들고 캘리포니아로 향했지만, 그곳에서 기다리는 건 꿈이 아니라 착취와 판자촌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연방 준비 제도의 대응도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연준이란 미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 통화량과 금리를 조절해 경제를 안정시키는 임무를 가집니다. 그런데 당시 연준은 경제가 무너지고 통화량이 급감하는 상황에서 금본위제(Gold Standard), 즉 화폐 가치를 금의 보유량에 고정시키는 제도라는 교조적인 틀에 갇혀 오히려 금리를 올리고 통화량을 줄였습니다. 불이 난 집에 산소를 공급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루스벨트의 뉴딜정책 그리고 대공황의 후폭풍
1933년 취임한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자체뿐입니다"라는 말로 시작해, 전통적인 자유방임주의와 정반대 방향을 택했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은행 휴일(Bank Holiday) 선포였습니다. 은행 휴일이란 정부가 강제로 모든 은행 영업을 일시 중단시킨 후 재정 건전성을 검증하여 국민이 다시 은행을 신뢰할 수 있도록 재개장하는 조치입니다. 이 발상의 핵심은 공황이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붕괴라는 진단에서 나왔습니다.
뒤이어 나온 것이 뉴딜(New Deal) 정책입니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 공사(TVA)로 댐을 짓고 전력을 공급하며 일자리를 쏟아냈고, 민간자원보존단(CCC)은 9년 동안 30억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었습니다. 음악가와 화가에게도 정부가 지원금을 줘서 동네 벽화를 그리고 공원에서 공연하도록 했습니다. 경제 정책이 문화 예술까지 아우른 방식은, 루스벨트가 사람들의 자존감 회복 자체를 경제 회복의 핵심 조건으로 봤다는 뜻입니다.
1929년의 고통 끝에 만든 안전장치가 글래스-스티걸법(Glass-Steagall Act)입니다. 이 법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를 엄격히 분리하여 고객 예금이 투기적 투자에 동원되는 것을 막는 규제입니다. 그런데 1999년 그래엄-리치-블라일리법으로 이 장벽이 철폐됩니다. "금융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이었죠.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제가 대학생이던 시절에 직접 목격했습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 파산과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위기, 신용 등급이 낮은 사람들에게 무분별하게 제공한 주택 담보 대출이 연쇄 폭발한 사건이었습니다.
대공황은 미국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미국은 유럽에 엄청난 돈을 빌려준 채권국이었고, 위기가 터지자 자금을 회수하면서 유럽 경제가 도미노처럼 무너졌습니다. 각국은 블록 경제(Bloc Economy)로 대응했습니다. 블록 경제란 자국과 식민지를 하나의 폐쇄적 경제권으로 묶고 외부 블록에는 높은 관세 장벽을 세워 교역을 차단하는 방식입니다. 그 결과는 국제 무역량의 급감이었고, 식민지를 가지지 못한 독일과 이탈리아와 일본은 군사적 팽창으로 자신만의 블록을 만들려 했습니다. 그게 제2차 세계대전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역사는 고립이 아닌 협력으로, 배제가 아닌 포용으로 위기를 넘어왔다고 말합니다. 1929년의 영수증을 처리한 것은 월스트리트의 은행가들이 아니라 길거리로 나앉은 수백만 명의 노동자와 농민이었습니다. 파티는 엘리트들이 즐기고 설거지는 서민들이 하는 구조, 이 구조는 항상 반복되어왔고 이를 이해하는 것이 경제역사 공부의 진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대공황을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